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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다


시간이 어찌나 빠르게 흐르는지 내게 있었던 시간들이 뭉텅뭉텅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논바닥에 모판이 내던져지듯 말이다. 정신없이 바쁜 일상을 살다 보면 이따금 선물처럼 찾아오는 막간의 여유 시간이 무척이나 귀하게 느껴지곤 한다. 그 시간에 나는 문득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개미처럼 일만 하며 바쁘게 살아도, 베짱이처럼 삶을 그저 즐기기만 해도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게 죽음이라는 생각. 그것은 어쩌면 탄생과 더불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운명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 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삶 전체를 통해 우리는 대개 죽음을 그저 내가 아닌 타인의 문제로만 인식하거나 자신의 미래에 있을 일이지만 그 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는 낭만의 시기 와 어떤 일을 하더라도 시시각각 죽음을 떠올리게 되는 실존의 시기 를 체험하게 된다. 물론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죽을 때까지 낭만의 시기 를 살다 가거나 자신에게 죽음은 아주 먼 미래의 일인 듯 느껴지지만 항상 죽음을 염두에둔 채살아가는 낭만적 실존의 시기 를 체험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낭만의 시기 에서 실존의 시기 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혹은 자신과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 주어진 운명 을 생각하게 된다."그가 이승의 마지막 잠을 혼자서 청했던 그 시각, 나는 제주도에서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가 혼자서 마지막 글을 수정해 컴퓨터에 다시 저장하고 봉화산 돌계단을 걸어 올라갔던 그 시각, 나는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텔레비전 속보를 보고 누군가 전화를 하기 전까지, 나는 그가 떠났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p.345)그가 컴퓨터에 저장했다는 유서에는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라는 말이 등장한다. 죽음을 직전에 둔 사람이 마치 넘지 못할 높은 벽처럼마주했을 운명 . 운명 에 대한 믿음의 정도는 개인의 종교, 철학, 성장 배경이나 성향에 따라 천차만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낭만의 시기 에서 실존의 시기 로 전환되는 그 순간에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마치 운명처럼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된다.부모님이나 배우자 혹은 가깝게 지냈던 친구나 존경하던 누군가의 죽음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한다. 그리고 내 삶에서 철없고 행복했던 낭만의 시기 가 이미 저물었음을 조금씩 깨닫게 된다.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이다>는 사실 노무현 당신이 아닌 유시민 작가에 의해 정리되고 노무현 재단에 의해 출간된 책이다.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전기의 형식으로 또는 자서전의 형식으로 정리한다는 게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마는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의 일대기를 전기가 아닌 자서전의 형식으로 정리했다는게 노무현 대통령의 삶을 마감하는 마침표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누구의 발상이었든 지극히 유시민답다 는 생각도 문득 들었지만 말이다."퇴임한 직후 노무현 대통령은 자서전을 쓰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가치 있는 자서전은 거짓과 꾸밈없이 진솔하게 써야 하는데, 정치인으로서 대통령으로서 관계를 맺었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현업에 있는 상황이라 모든 것을 사실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더 많이 흐른 후에야 자서전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p.7)훗날로 미루었던 자서전의 집필은 끝내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자서전을 써야 할 당신이 여기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의 죽음은 자서전을 쓰지 못한 일 개인의 죽음으로 그치지 않는 듯하다. 당신이 떠난 지 벌써 십일 년.당신의 부재로 인해 당신을기억하고 추모하는 많은 국민들로 하여금 그들 각자의삶을 낭만의 시기 에서 실존의 시기 로 이끌지 않았을까.그리고퇴임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당신을 결국죽음으로 내몰고야 만 이명박 대통령과 그를 추종하던 검찰과 국정원, 스스로 기레기를 자처하던 언론들... 실존의 시기 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5월은 당신의 부재로 인해 매년대상도 특정할 수 없는 누군가에 대한 분노와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슬픔을 더해 가고 있다. 올해도분노와 슬픔의 계절이 그렇게 가고 있다.
미안해 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운명이다 는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1주기를 맞이해 고인이 남긴 저서, 미발표 원고, 메모, 편지 등과 각종 인터뷰 및 구술 기록을 토대로 출생부터 서거까지를 일목요연하게 시간순으로 정리한 책이다. 기록을 일관된 문체로 정리하는 작업은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맡았다. 유시민 전 장관은 2009년 8월부터 2010년 2월까지 꼬박 6개월 동안을 이 정리 작업에 매진했다.

고인의 모든 자필, 구술 기록물들을 살펴 일대기로 정리하고, 빈틈은 유족과 지인들의 인터뷰, 공식 기록 등을 통해 보완했다. 또 고인이 남긴 여러 기록들 중 퇴임 후 서거 직전의 미완성 회고록 노트를 기본으로 문체를 통일하는 작업도 거쳤다. 유족과 재단 관계자들, 그 밖에 가까이에서 고인을 지켜봐온 지인들의 검토를 통해 사실관계를 철저히 확인하여 오류 가능성을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하였다.

이 자서전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프롤로그는 자서전의 집필 시점(고인이 회고록 초안을 위해 메모를 시작하는 시점)인 서거 직전의 상황을 담고 있다. 1부 ‘출세’는 출생에서부터 부산상고에 입학해 공부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해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2부 ‘꿈’은 부림사건을 맡은 이후 민주화운동에 헌신하게 된 이야기부터 정치에 입문해 민주당에서 대통령후보로 경선에 나서기 전까지의 이야기가 담긴다.

3부 ‘권력의 정상에서’는 2002년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승리하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부터 대통령 재임기간의 일을 담고 있다. 4부 ‘작별’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고향으로 내려가 새로운 꿈을 꾸고 실패한 후 서거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에필로그에서는 정리자인 유시민이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의 상황을 정리했고, 문재인 노무현재단 상임이사가 감사의 말을 썼다. 본문에는 고인의 생전 모습을 담은 올컬러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고맙습니다
노무현 자서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프롤로그: 실패와 좌절의 회고록

제1부 출세

1. 유년의 기억
2. 은인 김지태 선생
3. 내 인생의 부산상고
4. 막노동판에서
5. 권양숙을 만나다
6. 사법고시 합격
7. 세속의 변호사

제2부 꿈

1. 부림사건
2. 운동 전문 변호사
3. 사람 사는 세상
4. 분열과 좌절
5. 국회의원이 되다
6. 청문회 스타
7. 의원직 사퇴
8. 김영삼과 결별하다
9. 조선일보 와 싸우다
10. 첫번째 낙선
11. 야권통합
12. 지방자치실무연구소
13. 두번째 낙선
14. 세번째 낙선
15. 정권교체의 감격
16. 다시 국회로
17. 종로를 떠나다
18. 자동차 산업 살리기
19. 네번째 낙선, 노사모의 탄생
20. 해양수산부 장관

제3부 권력의 정상에서

1. 조선일보 인터뷰를 거부하다
2. 광주의 기적
3. 김대중 대통령과 나
4. 후보단일화
5. 단일화 파기의 우여곡절
6. 대통령 당선
7. 구시대의 막차
8.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거짓말
9. 양극화
10. 부동산 정책
11. 방폐장과 세종시
12. 대북송금특검법
13. 탄핵
14. 이라크 파병
15. 남북관계의 핵심은 신뢰
16. 한미 자유무역협정
17. 남북정상회담
18. 국정원장 독대보고
19. 검찰 개혁의 실패
20. 정치 권력과 언론 권력
21. 대연정 제안
22. 원칙 잃은 패배
23. 청와대를 떠나다

제4부 작별

1. 귀향
2. 봉하오리쌀
3. 화포천, 둠벙, 무논
4. 장군차
5. 국가기록물 사건
6. 수렁에 빠지다
7. 노무현의 실패는 노무현의 것이다
8. 마지막으로 본 세상

에필로그: 청년의 죽음